살다보면 뜻하지 못한 재앙이 닥칠때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너무나 괴롭다. 내 주위분들도 '연대보증 서준 년이 갑자기 회사 부도가 나서 홀라당 망해 돈을 뜯겼다'고 생각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날 밤의 민폐는 결코 의도한 바가 아닙니다.
지난 금요일, 개처럼 취해 진상을 부렸다. 내 블로그를 간간히 보신 분들이라면 이년이 술먹고 개짓한게 한두번이냐 하겠지만..이런 진상은 좀 많이 드물게 나온다.
내가 기억하는 한 이런 진상은 작년 늦봄인지, 초가을쯤에 한번 부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생각해보니 그날과 이날은 모두 같은 트렌치 코트를 입었구나! 빌어먹을.. 앞으로 그 코트는 안입을것만 같다. 그때도 굉장한 진상 & 추태 & 개짓을 한 후 약지를 자르며 술을 끊겠다고 맹세..한 것은 아니고 머리를 꿍꿍 찍으며 후회했다. 얼마나 한스러웠는지 삼일만에 백발이 될 뻔했다.
그러나 역사는 반복되고 인간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비가 미친듯이 오던 금요일 밤, 백발이 될 뻔했던 그날을 홀랑 잊은채 나는 꽐라가 되어 밤거리를 헤맸다. 학습능력이 전혀 없는 나란 유전자, 나 혼자 몸속에 고이 껴안고 죽으리라. 번식따위를 해서 이런 유전자를 세상에 방출할 수는 없다. 그것만이 내가 인류에게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길이다.
일단, 지난 날의 추태는 설명하지 않으련다. 너무 많이 지났기도 하려니와 쓰는 도중에 다시 백발이 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의 추태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겠다. 왜냐면, 왜냐면, 왜냐면, 이번 추태에는 초면인 분들이 너무 많았으며(적어도 이런걸 챙피해할줄은 아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다) 두번째는 초면인 동시에 엄청난 봉사를 해주신 분이 계셨기 때문이다. 술 취할때마다 나의 무사귀가를 위해 힘써주시는 따뜻한 분들이 어디선가 쏙쏙 나타난다. 참 고마운 일이다.
토요일 아침, 눈을 뜨고 쿨하게 '죽자, 죽으면 되지' 라고 생각했으나 월요일부터 네발바닥에 불이 나게 일을 하다보니 부끄러운 마음도 어느정도 사라졌다.
그래서 늦은 금요일 모임 후기를 쓴다. 그러나 앞으로는 그 모임에 아마 못 나갈 것이다. 나가게 된다면 가면쓰고 나갈 생각이다.
금요일밤에는 비가 아주 많이 왔다고 한다. 번개도 신나게 쳤단다.
나는 금요일 밤에 분명 외출했었으나 알지는 못한다. 의식이 없었으므로.
금요일에는 홍대 앞에서 모임이 있었다. 홍대 근처에서 일하던 나는 퇴근길이 바쁘게 꼬리를 흔들며 달려갔다. 술, 술이다. 술이다!!
모 레스토랑에 도착하니 (익명인 이유는 이 레스토랑 역시 다시는 못갈것 같기 때문이다) 모 언니와 처음뵙는 네분이 계셨다.
술이 있으니 어색한 시간도 없다. 나만 그랬을 수도 있다. 와인과 요리를 신나게 마시기 시작했다. 보통 잘 안받는 술은 경계하기 마련인데, 문제는 내가 원래 와인이 안받는 타입이 아니
었다는 거다. 그런 술이 드물긴 하다. 그러나 있긴 있다. 막걸리, 동동주, 맥주 등이다. 그래서 위의 술들을 마시고 실수한 적은 없다. 처음부터 조절을 하기 때문이다. 허나 와인은, 불행히도 와인은 참 잘 마셨
었다. 와인부페 이런곳에 가면 한잔씩 주지 말고 병째 두고 가라며 진상을 부렸다. 물론 이제 저런 헛소리는 안할 생각이다. 아니, 내가 다시 와인을 마시게 될지도 의문이다.
사실 나는 취해도 필름이 끊기는 편도 아니
었다. 다음날 눈을 뜨면 어제 취해서 한 추태가 모조리 생각나서 몸부림치는..그런 인간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술 마시기 시작한지 두시간도 안되어 필름이 편집됐다.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금요일밤이 모조리 기억났다면 나는 보석밧줄로 목을 매고 예쁘게...아니 그냥 술냄새를 풍기며 죽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기억이 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추측을 해 볼 뿐이다.
모 레스토랑에서 나오기도 전에 내 의식은 신나게 집으로 퇴근했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내 앞에 앉았던 아가씨와 비오는 구로디지털 단지를 걷고 있었다. 술취한 자의 기억이 그러하듯 반짝이고, 시끄럽고, 걷기 힘들고, 어지럽고, 옆에 누가 어떻게 여기 있는지 모르지만 전혀 궁금하지도 않고, 아무튼 그런 기분이었다.
어딘가를 들러서 신발을 갈아신었던 것 같기도 하다. 왜냐면 난 비오는데 삼선 쓰레빠 신고 있었으니까. 아마 내가 구두를 신었는데 오지게 못걸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걷기 힘들다고 맨발로 걸어가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나는 삼선 쓰레빠를 신고 그 아가씨의 호의와 팔에 기대 무작정 걸었다.
집 근처라고 마중이라도 나왔는지 구로디지털 단지부터 집까지 오는동안 의식이 슬금슬금 육체로 기어들어왔다.
옆의 아가씨에게 미안함과 감사한 마음으로 고개를 조아리고 싶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아 병든 닭처럼 고개만 흔들었다.
보살같은 아가씨는 개의치 말라며 손을 흔들고 나를 집에 무사히 넣어주었다. 그리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반성문을 조금 쓰다 잠들었다.
다음날, 술먹고 진상을 부린 날이면 여지없이 쑤시는 삭신을 두들기며 머리를 곰곰 굴렸다.
도대체 내가 어떤 진상을 부렸을까? 술을 마신것도 기억이 나고 집에 온 길도 기억이 나는데, 가장 진상을 부린 순간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거다. 나는 호기심 반, 무서운 진실을 알기 전 두근거리는 마음 반으로 머리를 쥐어짰다. 그러나 차마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내가 계산을 하긴 했을까? 택시비는 냈을까? 문자를 보니 카드를 썼긴 썼으나, 맞게 썼는지는 모른다. 모자란 돈은 주위 사람들이 경멸하며 냈을지 모른다. 나는 두려웠다. 그러나 가장 두려운 것은 내가 어떤 추태를 부렸는지 전혀 기억이 안난다는 점이었다.
기억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나는 가방을 털었다. 그렇게 취한것치고는 희한하게도 반지, 목걸이, 지갑, 카드지갑, 구두를 넣은 봉다리 심지어 우산까지 빼먹지 않고 모조리 챙겨넣었더랬다. 뭐지...그 와중에 정신을 차렸나...라고 생각한 순간, 가방에서 무언가 펄렁펄렁 떨어졌다. 크고 두툼하고 시뻘건 무언가가...
그것은 크고 아름다운 빨간 냅킨이었다.
그렇다. 수수께끼는 모두 풀렸다. 나는 의식을 잃고 어딘가에..아니 아무곳에나 토를 질질 흘리며 실려왔던 것이다. 보다 못한 누군가가 내 모가지에 크고 빨간 냅킨을 둘러주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깃발마냥 휘두르며, 천둥이 꽝꽝치는 금요일 밤 맨발에 쓰레빠를 신고 집까지 온 것이다.
진지하게 고백하건데, 주말동안 나는 커다란 빨간 냅킨을 목에 두르고 아무곳에나 토하는 여자의 동영상이 인터넷에 뜰까봐 마음 졸였다. 그리고 다시 한번 결심했다. 그래, 죽으면 되지 뭐.
여러분, 제가 연락이 없으면 프리티 데쓰..아니 그냥 더럽게 죽은 줄 아시면 됩니다.
금요일 밤의 참상jpg
금요일 밤 이후, 내가 또 술 마시는 날이 있을까...했는데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물론 마셨습니다.
이제 한번 액땜했으니 올해는 아마 저런 추태가 더이상 없을겁니다. 믿어주세요. 이 참상은 모두 간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를 집까지 데려다 준 보살님, 아마 복받으실 거예요. 고맙다고 하고 싶은데 미안해서 만나자는 말도 못하겠다능....
어쨌거나 그날 이후 의기소침해져서 두 귀를 접고 네발을 웅크리고 개집에 죽은듯이 엎드려있다.
누가 술먹자고 불러도 꼬리를 축 내리고 집에가서 혼자 소맥을 말아마시고 잔다. 다시 술마시러 나갈 용기가 날까? 나와 술 마셔줄 사람이 아직도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할때면 옆에서 언니가 한심하게 바라본다.
그래 가지고 세상을 살겠냐, 난 소개팅 나가서도 토한 사람이야. 앞에 가는 사람 후드 모자에 토한 것도 아니고 새로 산 선배 구두에 토한것도 아니고, 검은 봉다리 귀에 걸고 온것도 아니고 그냥 토한게 무슨 말할 가치가 있냐!
물론 저 예시는 그냥 예시는 아니고 실례다. 물론 그 주인공은 개의 언니다. 그래도 마음은 가벼워지지 않는다. 더욱 무거워질 뿐이다. 왜 내 유전자는 이 모양이지..............
정정하겠다. 그날의 추태는 간 때문이 아닙니다. 유전자 때문입니다.